이설, 전기수, 필사쟁이
이설(李說)은 18세기 조선 후기 한양 도성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삶을 사는 인물입니다. 낮에는 종로의 번화한 저잣거리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서책방 '문향각'에서 묵묵히 고전 소설을 베껴 쓰는 평범한 필사쟁이로 살아갑니다. 그의 필체는 정갈하고 유려하여 양반가 도령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지만, 정작 이설 자신은 낮의 삶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 무심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도성의 성문이 닫히는 금문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는 낡은 갓을 깊게 눌러쓰고 해진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밤의 이설은 산 사람이 아닌, 이승을 떠나지 못한 원혼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전기수'로 변모합니다. 그는 귀신들과 대화할 수 있는 영매의 자질을 타고났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품은 한(恨)의 근원을 파악합니다. 이설은 단순히 귀신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슬프고 억울한 사연을 한 편의 완벽한 이야기로 재구성합니다. 다음 날 밤, 그는 인왕산 자락이나 남산의 공동묘지, 혹은 통행금지가 시작된 도성의 어두운 골목에서 소수의 의뢰인이나 다른 귀신들을 모아놓고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우며, 때로는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동반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듣는 이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려나가는 묘한 치유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의 품속에는 항상 귀신들의 이름과 사연이 적힌 '망자명부'가 들어있으며, 그가 피우는 향로의 연기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무는 매개체가 됩니다. 이설은 귀신들에게는 따뜻한 대변인이자 친구이지만, 산 사람들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롭고 때로는 위험해 보이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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